봉오동 전투 - 종이 영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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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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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는 단 하나! 달리고 달려, 일본군을 죽음의 골짜기로 유인하라!

1919년 3.1운동 이후 봉오동 일대에서 독립군의 무장항쟁이 활발해진다.
 
 일본은 신식 무기로 무장한 월강추격대를 필두로 독립군 토벌 작전을 시작하고,
 독립군은 불리한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봉오동 지형을 활용하기로 한다.
 
 항일대도를 휘두르는 비범한 칼솜씨의 해철(유해진)과 발 빠른 독립군 분대장 장하(류준열)
 그리고 해철의 오른팔이자 날쌘 저격수 병구(조우진)는
 빗발치는 총탄과 포위망을 뚫고 죽음의 골짜기로 일본군을 유인한다.
 
 계곡과 능선을 넘나들며 귀신같은 움직임과 예측할 수 없는 지략을 펼치는 독립군의 활약에
 일본군은 당황하기 시작하는데...
 
 1920년 6월, 역사에 기록된 독립군의 첫 승리
 봉오동 죽음의 골짜기에 묻혔던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된다.

봉오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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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중반기인 1920년 6월, 홍범도를 필두로 최진홍, 안무 등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 독립군 연합부대가 중국 지린성 허룽현 펑우동(鳳梧洞, 한국명 봉오동)에서 정규 일본군인 월강(越江) 추격대대와 교전한 사건이다. 대중들 사이에서는 독립군의 대표적인 전과로 청산리 전투와 함께 '대첩'이라는 말도 붙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대중들이 인식하는 내용과 한국사학계의 연구가 완전히 평행선을 그리는 역사다. 2019년 봉오동 전투가 일본군 피해를 실제보다 심하게 과장하여서 역사왜곡 논란을 빚고 있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지역에서 조선독립군의 무장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자 일제는 1920년 5월 독자적인 조선독립군 및 독립 투쟁세력을 소탕 및 토벌을 하기 위한 작전을 펴게 되었고 이 때부터 만주지역에서도 조선독립군의 무장활동을 방해하고 소탕하기 위한 일ㄹ제의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에 맞서 홍범도가 이끌었던 대한독립군은 북간도지역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고 만주 지린 성봉오동으로 집결하여 한반도진공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당시 체코인 포로로 편성된 러시아군 산하 체코군단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이어 전쟁이 끝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귀국하면서 모신나강등 우수한 유럽제 무기를 독립군에게 넘겼기 때문에 독립군의 화력은 이전보다 크게 배가된 상태가 아니라 그당시 독립군은 일제의 감시 하에 있었으므로 무기를 밀림을 통해 밀매해야 했는데 그때 무기 밀매가 자금 부족으로 실패하면서 결국 우리 독립군에겐 화승총과 수류탄 경기관총 등 빈약한 화력 뿐이었고 그외에는 흙 뿌리거나 돌멩이 던지기 혹은 죽창이나 대검으로도 싸웠다. 말 그대로 닥치는대로 싸운 것.체코제 무기 도입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평소에 독립군을 크게 얕잡아보았기 때문에 '기껏해야 화승총이겠지' 하는 인식하에 독립군의 매복 가능성마저 무시하고 전술을 전개했다. 홍범도의 대한북로독군부 800~900여 명은 일제의 추격대가 오는 걸 알게됐고, 추격대를 격퇴할 준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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